믿기는가.
오늘은 아이오와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아이오와는 미국에 있는 한 촌 동네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내가 유배 (ㅎㅎ) 아니 유학 온 곳이다.
초등학교 때 일주일 간 가족 여행으로 갔던 하와이를 제외하고는 처음 오는 미국이었다.
유학을 준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어도 오지게 못했고 (물론 지금도 잘은 못하지만 그때는 정말 심각했다... 사람을 워낙 좋아했어서 신입생 오티 때 외국인들한테 나랑 같이 앉자 다들 이리 와 커몽커몽하며 데려와놓고, 그 뒤로 한마디도 못 알아들어서 난처했던 기억이...^^)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는, 든든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아나가는 게 처음이었기에 조금 힘들기도 했다.
아이오와를 떠나는 김에, 나의 20대 초중반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2018년 - 나의 21살, 만 19-20살
1월에 처음으로 아이오와라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곳에 왔고, 미국인 룸메 Sasia와 좁아터진 방 하나를 같이 쓰며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그나마 알았던 한 한국인 언니랑은 우리는 영어 배우러 온 거니까 너무 한국인들이랑만 놀진 말자라고 다짐도 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연두색 차를 몰던 중국인을 만나기도 했었는데 내가 영어를 오지게 못했어서 (걔는 나보단 나았던 듯...?) 거의 바디 랭귀지로만 소통했다.
영어를 못 해서 많은 게 어려웠다. 일상생활이 안되니까 나를 마냥 많이 도와주던 한 오빠를 좋아하게 되기도 했었다. 영어를 못하고 혼자 살아본 적도 없어서 일상생활이 잘 안 되고 모든 게 서투니까, 나에 비해 영어를 잘하고 일상생활이 잘 되는 그를 보며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너무 어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발랄하고 어리고.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어 했다. 무튼 사랑인 줄 알았던 나의 그때 그 감정은, 돌아와 생각해보니 정신적 미숙함 때문이었다. 혼자서는 불안정했기 때문에, 나의 불안정함을 채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생존 본능인가...? 무튼 정신적 미숙함이 크게 작용했던 감정이라고 해서, 그때의 내 감정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신적으로 조금 미숙했기에, 그렇게 열심히 누군가를 좋아하고 위할 수 있었나 싶기도 하다. 뭐랄까 지금은 그게 잘 안되어서... 결과적으로 나는 그 경험을 통해 많은 걸 배웠고, 내 자존감 또한 크게 상승했다. 나도 (가족이 아닌) 어떤 한 사람을, 그렇게까지 위하고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구나. 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도 4년 후의 내가 보면 어릴 수 있다. 이해가 더 혹은 덜 될 수도 있고, 지금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그때는 캐치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나가는 것 같다. 이게 좋다. 변화와 발전, 성장이 없다면, 나는 나의 내일이 기대되지 않을 것 같다.
2019년 - 나의 22살, 만 20-21살
여전히 어렸다.
'어렸다'라는 표현을 부정적인 의미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뭐랄까. 내가 되돌아봤을 때 이렇다 할 생각이 없었다는 의미...? 기록한 적이 없기에 그때의 내가 무슨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벌써 잊은 걸 수도 있는데, 내 기억상으로는 딱히 생각을 하고 지내진 않았던 것 같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행복해하는 것은 되게 쉬웠고, 나로 하여금 생각과 변화를 요구하는 특정한 문제도 없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2018년도 가을 학기에 CS1 수업을 같이 들었던 오빠하고 연애를 시작했다. 영어가 반년만에 늘리는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는 쉽지 않은 수업이었는데, 서로 막히는 부분이 달라서 (나는 영어, 오빠는 CS) 서로 도움이 많이 되었고, 문제 풀이도 둘이 하니까 너무 재미있었다. 같이 있으면 보다 우리 둘 다 나아지는 것 같아서, 시너지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때 시작한 연애를 한 2년은 했다. 19년의 나는 수업 듣고, 남자 친구랑 놀고... 술 먹고. 그렇게만 지냈던 것 같다.
2020년 - 나의 23살, 만 21-22살
봄학기에 코로나가 터져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되었다. 그래서 4월에 한국으로 돌아갔고, 학기가 끝나고는 마냥 놀다가, 9월부터 21년 3월까지 6개월 간 인턴을 했다. 인턴십 시작 전에 만나던 남자 친구와는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연애는 자극적이고 재미있었다. 진지하게 만나기 시작한 건 아니고 나랑도 전에 만났던 사람과도 매우 달라서 그냥 좀 궁금했던 건데, 생각보다 엄청 오래 잘 만났다.
난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는 호감이 생기지 않는다. 내가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게 그 이유인 것 같다. 나는 이제 나를 꽤나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내가 썩 맘에 들진 않으니까. 비슷한 사람이랑 연애를 시도하고 실패한 경험도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이제 나와 비슷해 보이면 별로 궁금하지 않다. 나와 많은 게 다른 사람, 배울 점이 많은 사람, 같이 있으면 둘 다 서로 발전할 것 같은 사람이 좋다. 달라 보이는 점들에 끌려서 연애를 시작해도, 지내다 보면 그 사람과 나 사이의 비슷한 점들을 꽤나 발견하고는 한다. 그렇다면 굳이 비슷한 점들을 가진 인간을 찾아 나설 필요는 더 없지 않은가.
집 앞에서 거의 매일 같이 보이는 길 고양이들에게 마음을 쏟기 시작했고, 아픈 한 마리 때문에 너무 속상해서 며칠간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하물며 정든 길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이렇게까지 속상한데, 나중에 내 배 아파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 얼마나 행복하고 마음 찢어지는 일이 잦을지에 대해서 감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 야옹이를 구조해서 돌봐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긴 하다. 마땅치 않으면 유튜버 윤그린님에게 한번 이메일을 보내볼 생각이다.
2021년 - 나의 24살, 만 22-23살
3월에 끝난 6개월 간의 인턴십을 통해 느낀 게 많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고 느꼈다. 나는 멍청했고, 일머리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인턴이 뭘 알겠는가, 실수해도 괜찮은데 그러고 싶지 않아서 매사에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했고, 쓸데없는 일들에 시간을 쏟으며 일처리 속도를 더 느리게 만들었으며, 결국 내 기준 중간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한국에서의 시간을 재밌게만 보내다가 아이오와로 돌아왔다. 7월 말이었다. 떠날 때에는 일 년 간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1년간 방치되어 있던 짐들을 정리했다. 더워서 뒤지는 줄 알았다.
새로운 아파트 unit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항의했더니 무브인 데이트가 몇 주 미뤄졌고, (안친한) 아는 동생네 집에 얹혀 지냈어야 했다. 얹혀 지내는 곳 아파트에 그때 잠시 친했던 오빠들 두 명도 살았어서 재밌었다. 모더나 백신을 맞았고 부작용이 심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가만히 있을 때 심장이 쿵쾅거린다고 느껴본 적 없었는데, 심장이 너무 잦게, 빨리, 크게 뛰었다. 지금도 드물지만 그 증상이 있다.
룸메이트로 터키인 Emily를 만났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남자 친구와는 롱디를 했고, 감사하게도 그는 9월 즈음인가 나를 보러 몇 주간 미국 여행도 왔다. 재밌고 좋은 일들도 많았지만 제일 힘든 학기였다. 외로웠지만 여유는 없었고 잘 해내고 싶었지만 집중하긴 힘들었다. 나의 면모 중 그 어떠한 점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나를 위해서는 버튼 몇 개조차 눌러주기도 싫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싫어서 꺼이꺼이 울어봤다. 지나고 나서 알았다. 우울증이었다.
2022년 - 나의 25살, 만 23-24살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유튜브를 통해 어떻게 무기력증과 불안, 두려움을 떨쳐내고 내가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공부했다. procrastination에 관한 영상들을 찾아보고 공감하고 도움이 되는 말들, 내가 해볼 수 있는 일들을 적었다.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제일 큰 문제점이었다. 너는 욕심이 많아서 시작하고 끝내고 싶은 일이 많다. To-do-list를 적는데 쓰면서도 다 못할 것을 안다. 그렇지만 다 하고 싶으니까 적는다. List에 적힌 것들 중 두 개는 무슨, 단 하나도 끝내지 못한다. 기분이 안 좋다. 악순환인 것이다. 우울증과 무기력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려면 기준을 낮춰야만 했다. 다 해내지 못할 일들을 적고, 다 해내는 게 불가능할 것 같으니까 시도조차 않아버리는 짓을 더는 반복해서는 안되었다. 작은 일들을 해냄으로써 너는 할 수 있다고 북돋아줘야 했다. 대단한 일을 성공해내지 않아도 돼. 매일 조금씩만 더 날 행복하게 만들어주자. 이제껏 너의 행복은 주어진 것에 대해 편안함을 느끼며 감사해하고 만족해하는 것이었지만, 이제 너는 행복하지 않잖아. 그것만으로는 하나도 괜찮지 않잖아.
나를 위해 매일 10분간 스트레칭을 해주기로 했다.
오래 머물 곳도 아닌 내 방을 꾸미는 일 같은 건 귀찮았다. 만족스럽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나를 표현해주는 것들로) 잘 꾸밀 수 있는 게 아니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낫지, 라고 생각했었고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들이 나를 표현해주는지 몰랐다.
반 고흐의 Skull of a Skeleton with Burning Cigarette 그림과 룸 데코용 포스트들을 구매했다. 방을 꾸몄다.
꽤 오래전부터 스케이트 보드를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화창한 어느 날 하루, 스케이트 보드를 배우고 싶단 생각이 다시 한번 스쳤다. 피부가 다 갈라져가는데 나를 위해 핸드폰 버튼 몇 번을 눌러주기 귀찮아 5개월이 넘게 로션을 구매하지 않았던 지난 학기의 내가 떠올랐다.
스케이트 보드를 배웠다. 순전히 내가 하고 싶어서, 오직 그 이유만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게 얼마나 오랜만이었는지 모른다.
친구들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냈다. 롱디로 만나던 남자 친구와는 5월 초에 헤어졌고 졸업을 했다.
아파트 계약이 끝나는 내일, 이곳을 떠난다. 지금 이 글은 스타벅스 야외 자리에서 쓰고 있다. 며칠간 짐들을 다 정리하고, move out 준비만 했다. 앞으로는 보기 힘들 이곳의 친구들과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도 노력했다.
아이오와는 내 20대 초중반의 전부이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에도, 내가 곧 돌아갈 다른 하나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매사에 더 감사해하고 행복해할 수 있었다. 두 개의 집이 있다는 것은 각자의 장단점과 함께 내게 큰 행복이자 기회였고, 나는 이곳에 홀로 서서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고 빚어나갈 수 있었다. 독립이라는 것은, 외로움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지, 힘들 때 나는 어떻게 힘들어하고 괜찮아지는지, 내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방법은 무엇인지. 작게는 나를, 크게는 두 개의 다른 공간이 내게 쥐어주는 기회들을 가져볼 수 있는, 정말 값진 시간이었다. 앞으로 내가 새로 경험할 장소들과 일들은 무궁무진하지만, 이곳에서 내가 만들어나갔던 나만의 작은 세상은 결코 잊지 않고 안고 갈 것이다.
미숙하고 어렸던 나는 이곳에서 "내가" 보낸 시간을 통해 단단해지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아이오와라는 동네 자체에도 감사하다.
한국과 아이오와에서 나를 응원해줬던 친구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안녕, 아이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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